툴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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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툴룬 왕조는 9세기 이집트를 중심으로 시리아까지 통치했던 이슬람 왕조이다. 아바스 왕조의 혼란한 정치 상황을 틈타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시작되었다. 툴룬 왕조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집트의 경제적 번영을 이끌었으며, 이븐 툴룬 모스크를 건설하는 등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후계자들의 무능과 아바스 왕조의 압박으로 10세기 초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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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룬 왕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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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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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토착 이름 | الإِمَارَةُ الطُّولُونِيَّة (아랍어) |
일반적인 긴 이름 | 툴룬 왕조 에미리트 |
일반 명칭 | 툴룬 왕조 |
제국 | 아바스 왕조 |
지위 | 아바스 왕조의 봉신 |
건국 | 868년 |
멸망 | 905년 |
멸망 사건 | 아바스 왕조의 재정복 |
선행 국가 | 아바스 왕조 |
후행 국가1 | 아바스 왕조 |
후행 국가2 | 이흐시드 왕조 |
공용어 | 고전 아랍어 이집트어 그리스어 시리아어 고대 누비아어 (공용) 튀르크어 (군대) |
종교 | 수니 이슬람 (주류), 정교회 기독교인 |
수도 | 알-카타이 |
정부 형태 | 사실상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자치 에미리트 법적으로 칼리프의 총독령 에미리트 |
통치자 | |
직책 | 에미르 |
초대 통치자 | 아흐마드 이븐 툴룬 |
초대 통치자 임기 시작 | 868년 |
초대 통치자 임기 종료 | 884년 |
마지막 통치자 | 샤이반 이븐 아흐마드 이븐 툴룬 |
마지막 통치자 임기 시작 | 904년 |
마지막 통치자 임기 종료 | 905년 |
경제 | |
통화 | 디나르 |
2. 역사
툴룬 왕조의 흥망성쇠는 9세기 이슬람 세계에서 지역주의가 점차 강화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일어났다. 당시 아바스 왕조는 정치적 혼란과 함께 보편적 정통성을 잃어가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전에도 이집트에서는 콥트교도나 알리파(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추종자)가 주도하는 독립 움직임이 있었지만, 일시적이거나 지역적인 성공에 그쳤다. 또한, 튀르크계 군 지휘관들과 바그다드 중앙 행정부 사이의 권력 다툼, 그리고 심화되는 제국의 재정 위기 등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툴룬 왕조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5][19]
아바스 왕조 내부의 정치 상황 역시 불안정했다. 870년, 메카로 추방되었던 아바스 왕조의 왕족 알-무와파크(891년 사망)가 남부 이라크에 대한 왕조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소환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칼리프를 대신하는 실질적인 통치자로 부상하며 중앙 권력의 불안정성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은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이집트에서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5][19][32]
결과적으로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아바스 왕조 중앙 정부의 영향력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지역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툴룬 왕조의 성립과 발전은 9세기 이슬람 세계의 다른 왕조들, 예를 들어 북아프리카의 아글라브 왕조나 페르시아 동부의 타히르 왕조와 같이 중앙 권력의 약화를 틈타 등장한 지역 세력들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5][19][32]
2. 1. 아흐마드 이븐 툴룬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툴룬 왕조의 창시자이다. 그는 본래 아바스 왕조의 튀르크계 군인 출신으로,[16][17] 9세기 후반 아바스 칼리파조의 정치적 혼란과 약화[5]를 이용하여 이집트에서 실질적인 독립 세력을 구축했다.868년(이슬람력 254년) 이집트 총독의 대리인으로 파견된[18][19] 그는 독자적인 군대를 조직하고 재정권을 장악하며 빠르게 이집트 내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립했다.[5] 중앙 정부인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조는 내부 혼란으로 인해 그의 세력 확장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했다.[5]
877년, 아바스 왕조가 파견한 군대를 격퇴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으며, 이듬해에는 시리아까지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했다.[1][14] 이를 통해 그는 이집트를 외부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고 독자적인 통치 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6][20]
그의 10년 이상 이어진 통치 기간 동안,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잘 훈련된 군대, 안정적인 경제, 효율적인 관료 조직을 바탕으로 강력한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5] 그는 바그다드로 보내던 세수를 이집트 내정에 사용하여 관개 시설을 확충하고 해군을 창설하는 등 지역 경제와 무역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6] 사망하기 전 아들 후마라와이흐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왕조의 연속성을 확보했다.[5] 그의 성공적인 독립과 통치는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 점증하던 지역주의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동시대의 아글라브 왕조나 타히르 왕조와 비견된다.[5][32]
2. 1. 1. 초기 생애와 권력 장악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본래 바그다드에서 조직된, 대부분 중앙아시아 출신의 튀르크[16] 경호대의 일원이었다. 그의 아버지 툴룬은 이란 지역의 사만 왕조가 아바스 칼리파에게 공물로 바친 노예 병사(굴람)였다.[16][17] 이후 알 무타심 칼리파가 사마라를 수도로 정비하면서 그곳에 정착했다.
868년(이슬람력 254년),[18]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당시 이집트 총독이었던 바야크바크(Bāyakbāk, 870년 사망)의 대리인으로서 이집트로 파견되었다. 바야크바크는 칼리파 알 무타즈를 대신하여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었다.[19] 이집트에 부임한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신속하게 독립적인 군대를 조직하고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의 재정 관리권을 장악하며 이집트 속주 내에서 군사적, 재정적 기반을 확립했다.[5]
877년,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바그다드의 중앙 정부에 보내는 공물을 충분히 납부하지 않자, 아바스 칼리파조는 그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이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고, 이듬해에는 시리아까지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14][1]
그의 10년이 넘는 통치 기간 동안,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잘 훈련된 군대와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마련했으며,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경험 많은 관료 조직을 구축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 후마라와이흐(Ḵh̲umārawayh)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권력 승계의 기반을 다졌다.[5]
이집트가 사실상 자치권을 확보하면서 세금 수입을 더 이상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보낼 필요가 없어졌다.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이 재원을 활용하여 관개 시설을 확충하고 해군을 창설했으며, 이는 이집트 지역 경제와 무역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878년에는 요르단 지구대를 점령하고 북쪽으로는 안티레바논 산맥의 비잔틴 제국 국경 지대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아바스 왕조의 잠재적인 공격으로부터 이집트를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했다.[6][20]
2. 1. 2. 이집트 통치와 독립
툴룬 왕조의 등장은 이슬람 세계 전반에 걸쳐 지역주의가 강화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 아바스 칼리파조는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중앙 권력의 위상이 약화되고 있었다. 이전에도 이집트에서는 콥트교도나 시아 알리드를 중심으로 한 독립 움직임이 있었으나, 일시적이거나 지역적인 성공에 그쳤다. 또한, 터키계 군 지휘부와 바그다드 중앙 행정부 사이의 권력 다툼과 제국의 재정 위기 역시 심각한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툴룬 왕조 시대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다.[5]
아바스 칼리파조 내부의 정치 상황은 매우 불안정했다. 870년, 알-무타와킬 칼리프의 아들인 아부 아흐마드 알-무와파크(891년 사망)가 남부 이라크 지역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메카에서 소환되었으나, 그는 곧 칼리파조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부상했다. 이러한 중앙 정부의 혼란은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이집트에서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고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결과적으로 툴룬 왕조는 아바스 칼리파조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으며, 이는 9세기 아글라브 왕조나 타히르 왕조와 같은 다른 이슬람 왕조들의 사례와 유사하다.[5]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본래 바그다드에서 형성된, 대부분 중앙 아시아 출신 튀르크 경호대의 일원이었으며, 이후 알 무타심 칼리프가 사마라를 수도로 삼으면서 그곳에 정착했다. 868년(이슬람력 254년),[4] 그는 당시 아바스 칼리프 알 무타즈의 대리인이었던 바야크바크(870년 사망)[5]에 의해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븐 툴룬은 이집트에 부임하자마자 즉시 독립적인 이집트 군대를 창설하고 이집트와 시리아 재무부의 관리를 인수함으로써 이집트 지방에 재정적, 군사적 입지를 확립했다. 877년, 이븐 툴룬이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보내야 할 공물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자 아바스 왕조는 군대를 파견했지만, 그는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자신의 권력을 지켜냈다. 다음 해에는 시리아까지 점령하며 세력을 더욱 확장했다.[1]
10년 이상 이어진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잘 훈련된 군대와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마련했으며, 국정을 효율적으로 감독할 경험 많은 관료 조직을 구축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 후마라와이흐를 후계자로 지명했다.[5]
툴룬 왕조가 사실상 완전한 자치를 이루면서, 이전처럼 세금을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보낼 필요가 없어졌다. 확보된 재원으로 관개 시설을 개발하고 해군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이는 지역 경제와 무역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878년에는 요르단 지구대 지역을 장악하고 북쪽으로는 비잔틴 제국과의 국경 지대인 안티 레바논 산맥의 전초 기지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아바스 왕조의 잠재적인 공격으로부터 이집트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했다.[6]
2. 1. 3. 시리아 정복과 확장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868년(254년 AH),[4] 아바스 칼리파조 칼리프 알 무타즈의 대리인 바야크바크(870년 사망)[5]에 의해 이집트 주지사로 파견되었다. 이븐 툴룬은 이집트에 부임한 직후 독자적인 군대를 창설하고 이집트와 시리아 재무부의 관리를 직접 맡음으로써 이집트 지역에서 재정적, 군사적 기반을 빠르게 확보했다. 877년, 아바스 칼리파조는 이븐 툴룬이 공물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축출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실패했다. 오히려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고, 다음 해인 878년에는 시리아까지 점령하며 영토를 확장했다.[1]
툴룬 왕조는 요르단 지구대를 장악했으며, 북쪽으로는 비잔틴 제국과의 국경 지대인 안티 레바논 산맥의 전초 기지까지 세력을 넓혔다. 이는 아바스 칼리파조의 잠재적인 공격으로부터 이집트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한 것이었다.[6]
이븐 툴룬이 사실상 완전한 자치를 확립하면서, 이전처럼 세금 수입을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보낼 필요가 없어졌다. 그는 확보된 재정을 바탕으로 관개 시설을 개발하고 해군을 건설하는 등 이집트의 경제와 무역을 크게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6] 그의 10년이 넘는 통치는 잘 훈련된 군대, 안정적인 경제, 그리고 국정을 운영할 경험 많은 관료 조직을 남겼으며, 아들 후마라와이흐를 후계자로 지명했다.[5]
2. 2. 쿠마라와이흐
아흐마드 이븐 툴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쿠마라와이흐가 정당한 후계자로서 권력을 잡았다. 그의 통치 초기에는 아바스 칼리파조의 실권자 알-무와파크가 파견한 군대의 시리아 침공과 아버지의 오랜 동맹이었던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 알-와시티의 배신 등 내우외환에 직면했다.[19]그러나 젊은 쿠마라와이흐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정치적,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890년까지 이집트에서 북부 이라크, 북쪽으로는 타르수스까지 툴룬 왕조의 영토를 확장하며 중동 정치 무대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 이후 그는 아바스 칼리파조와 두 차례 조약을 맺었다. 886년 알-무와파크와의 첫 조약으로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에 대한 툴룬 왕조의 통치권을 30년간 인정받았고, 892년에는 새로운 칼리프 알 무타디드와 두 번째 조약을 맺어 기존 합의를 재확인했다. 이 조약들은 툴룬 왕조 총독이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충성하는 봉신임을 명시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툴룬 왕조의 자치권을 인정한 것이었다.[19]
하지만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쿠마라와이흐의 통치는 왕조 쇠퇴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의 치세 동안 재정적 압박이 심화되었고, 정치적 분열이 일어났으며, 터키계 및 사하라 이남 출신 용병에 대한 군사적 의존도가 높아졌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툴룬 왕조의 재정과 군사력을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훗날 왕조가 멸망하는 배경이 되었다.[19][14]
2. 2. 1. 권력 승계와 내분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쿠마라와이흐가 지정된 후계자로서 권력을 승계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아바스 칼리파조의 실권자였던 알-무와파크는 툴룬 왕조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시리아를 침공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오랜 동맹이었던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 알-와시티마저 쿠마라와이흐를 배신하고 침략군에 합류하는 내부적인 문제까지 발생했다.[19]
이러한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젊은 쿠마라와이흐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능력을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했다. 그는 성공적으로 아바스 칼리파조의 군대를 격퇴하고 내부의 배신자를 처리했으며, 890년까지 이집트에서 북부 이라크, 그리고 북쪽으로는 타르수스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툴룬 왕조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그는 근동 지역의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세력을 확대한 쿠마라와이흐는 아바스 칼리파조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했다. 그는 아바스 칼리파조와 두 차례의 조약을 체결했다. 886년, 알-무와파크와의 첫 번째 조약을 통해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에 대한 툴룬 왕조의 통치권을 30년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892년에는 새로운 칼리프 알-무타디드와 두 번째 조약을 맺어 기존의 합의 내용을 재확인했다. 이 조약들은 툴룬 왕조의 총독 지위를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충성하는 봉신으로 규정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툴룬 왕조의 자치권을 인정한 것이었다.[19]
그러나 화려한 성공 이면에는 툴룬 왕조 쇠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쿠마라와이흐의 통치 기간 동안 왕조의 재정은 점차 고갈되었고, 정치적 내분은 끊이지 않았다. 또한 그는 군사적으로 터키계 용병과 사하라 이남 출신 병사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는데, 이는 군대의 불안정성을 야기했다. 이러한 재정적 압박, 정치적 분열, 그리고 외부 세력인 아바스 칼리파조의 지속적인 견제는 결국 툴룬 왕조가 멸망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19][14]
2. 2. 2. 아바스 왕조와의 관계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쿠마라와이흐가 지정된 상속자로서 권력을 승계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 초기부터 아바스 칼리파조와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당시 아바스 칼리파조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알-무와파크는 툴룬 왕조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시리아를 침공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오랜 핵심 동맹이었던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 알-와시티마저 아바스 군대에 투항하면서 쿠마라와이흐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19]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젊은 쿠마라와이흐는 정치적, 군사적 수완을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했다. 그는 아바스 군대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세로 전환하여 890년까지 이집트에서 북부 이라크, 북쪽으로는 타르수스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툴룬 왕조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중동 지역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한 쿠마라와이흐는 아바스 칼리파조와 두 차례에 걸쳐 협상을 진행하여 관계를 재정립했다.
첫 번째 조약은 886년 알-무와파크와 체결되었는데, 아바스 측은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에 대한 툴룬 왕조의 통치권을 30년 동안 인정했다. 이후 892년에는 새로운 칼리프 알 무타디드와 두 번째 조약을 맺어 기존 합의 내용을 재확인했다. 이 두 조약은 툴룬 왕조 총독의 지위를 바그다드에 있는 칼리프 가문의 봉신으로 공식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지만, 동시에 툴룬 왕조의 실질적인 자치권을 인정한 것이기도 했다.[19]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쿠마라와이흐의 통치는 불안 요소를 안고 있었다. 그는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고 궁정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사용했으며, 이는 국가 재정 고갈로 이어졌다. 또한 정치적 내분과 함께 튀르크족과 사하라 이남 출신 용병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군사 구조는 왕조의 안정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쿠마라와이흐 사후 툴룬 왕조가 급격히 쇠퇴하고 아바스 왕조에게 다시 정복당하는 원인이 되었다.[19][14]
2. 2. 3. 통치와 몰락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쿠마라와이흐가 지정된 상속자로서 권력을 계승했다.[19] 그가 처음 마주한 위기는 아바스 칼리파조의 실권자 알-무와파크가 보낸 군대의 시리아 침공이었다. 당시 칼리프는 알 무타미드였다. 또한, 아버지의 오랜 동맹이었던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 알-와시티가 아바스 측으로 돌아서는 내부적인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19]
쿠마라와이흐는 이러한 도전을 극복하고 정치적,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890년경에는 이집트에서 북부 이라크, 북쪽으로는 타르수스까지 툴룬 왕조의 권위를 확장시키는 데 성공했다.[19] 중동 정치의 주요 인물로 부상한 그는 아바스 칼리파조와 두 차례 조약을 맺었다. 886년 알-무와파크와 맺은 첫 조약은 아바스 왕조가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에 대한 툴룬 왕조의 통치권을 30년 동안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892년에는 새로운 칼리프 알 무타디드와 두 번째 조약을 맺어 이전 합의 내용을 재확인했다. 이 조약들은 툴룬 왕조 총독의 지위를 바그다드에 있는 칼리프 가문의 봉신으로 명확히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19]
그러나 쿠마라와이흐의 통치는 여러 성공에도 불구하고 왕조 몰락의 씨앗을 뿌렸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안정적인 경제와 천만 디나르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1] 하지만 쿠마라와이흐는 아버지와 달리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예를 들어, 892년 딸 카트르 알-나다를 칼리프 알-무타디드와 결혼시키면서 40만에서 100만 디나르에 이르는 엄청난 지참금을 주었다. 일부에서는 이를 툴룬 왕조의 재정을 고갈시키려는 아바스 왕조의 계략으로 보기도 한다.[1][14] 또한 충성심을 얻기 위해 재산을 함부로 사용하면서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14] 결국 그가 896년에 사망했을 때 국고는 바닥났고, 디나르 화폐 가치는 이전의 3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다.[1]
재정 고갈 외에도 정치적 내분, 튀르크 및 사하라 이남 출신 용병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 인한 군사적 불안정, 그리고 아바스 왕조의 지속적인 압박 등이 겹치면서 툴룬 왕조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19][14]
2. 3. 쇠퇴와 멸망
쿠마라와이흐의 통치는 툴룬 왕조의 영토를 북부 이라크와 타르수스까지 확장시키고 아바스 왕조로부터 30년간의 통치권을 인정받는 등[5] 외형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의 통치 말기부터 왕조 쇠퇴의 조짐이 나타났다. 막대한 재정 지출로 인한 고갈, 끊이지 않는 정치적 내분, 그리고 터키와 사하라 이남 출신 용병들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왕조의 기반을 약화시켰다.[1]쿠마라와이흐 사후, 그의 뒤를 이은 에미르들은 대부분 통치 능력이 부족했으며 짧은 기간 재위하다 군부에 의해 폐위되거나 암살당하는 등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1][14][33] 이러한 내부적 취약성은 아바스 왕조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했다. 아바스 왕조는 알-무와파크 사후 약화되었던 중앙 권력을 점차 회복하였고, 툴룬 왕조가 장악했던 시리아를 되찾은 뒤 이집트 본토를 침공했다.[33][1]
마지막 통치자인 샤이반 이븐 아흐마드는 무함마드 이븐 술라이만 알-카티브가 이끄는 아바스 군대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고, 결국 905년 툴룬 왕조는 건국 37년 만에 멸망하여 이집트는 다시 아바스 왕조의 직접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1][14][33] 툴룬 왕조의 멸망은 후계자들의 정치적 무능과 내부 분열, 그리고 이를 틈탄 아바스 왕조의 군사적 압박이 결합된 결과였다.
2. 3. 1. 후계자들의 무능
툴룬 왕조 후기의 에미르들은 모두 무능한 통치자들이었고, 국정을 운영하는 데 튀르크인 및 흑인 용병들에게 의존했다.[1][14]쿠마라와이흐의 아들인 아부 알-아사키르 자이쉬는 권력을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896년 툴룬 군부에 의해 폐위되었다.[1][14][33] 그의 뒤를 이어 형제인 하룬이 즉위했다. 하룬은 8년 동안 통치했지만 기울어가는 왕조를 되살리지 못했고, 아바스 칼리파조 군대가 시리아를 회복하고 이집트 침공을 앞둔 904년에 암살당했다.[1][14][33]
하룬의 뒤를 이은 삼촌 샤이반 이븐 아흐마드는 타르수스의 다미안이 이끄는 해군 함대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1][14] 무함마드 이븐 술라이만 알-카티브가 지휘하는 아바스 군대의 침공을 막아낼 수 없었다.[1][14][33] 결국 샤이반의 통치를 끝으로 툴룬 왕조는 멸망했다.[1][14][33]
2. 3. 2. 아바스 왕조의 반격
쿠마라와이흐 사후, 툴룬 왕조는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의 아들 아부 알-아사키르(자이쉬라고도 불림)는 896년 권력을 잡았으나, 즉위 직후 툴룬 군부에 의해 폐위되었다.[33][1][14] 그의 뒤를 이은 형제 하룬은 8년 동안 통치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왕조의 운명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결국 아바스 칼리파조는 툴룬 왕조의 약화를 틈타 반격에 나섰다. 아바스 군대는 시리아를 되찾고 이집트 침공을 준비했으며, 이러한 혼란 속에서 하룬은 904년에 암살당했다.[33][1] 하룬의 삼촌이자 마지막 통치자가 된 샤이반 이븐 아흐마드는 무함마드 이븐 술라이만 알-카티브가 지휘하는 아바스 군대의 침공을 막아내야 했다. 타르수스의 다미안이 이끄는 해군 함대의 지원[33] (혹은 국경 부대의 지원[1])에도 불구하고, 샤이반은 아바스 군대의 공세를 버텨내지 못했다. 결국 그의 짧은 통치를 끝으로 툴룬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33][1][14]
툴룬 왕조 후기의 에미르들은 대부분 통치 능력이 부족했으며, 국정 운영을 터키 용병과 흑인 병사들에게 과도하게 의존했다. 이러한 내부적인 취약성은 아바스 왕조의 반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하고 왕조가 멸망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1][14]
3. 문화
툴룬 왕조 시대에는 아바스 왕조의 문화적 영향 아래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에서 독자적인 문화가 발전했다. 창시자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새로운 수도 알-카타이를 건설하고 이븐 툴룬 모스크와 같은 중요한 건축물을 남겼는데, 이는 당시 사마라의 건축 양식을 반영한 것이었다.[7][21] 그는 종교적으로 수니파 이슬람을 장려하고 학자들을 지원했으며, 이는 하디스 연구 등 이슬람 학문의 발전과 샤피이 학파 부흥에 기여했다.[10][11]
아흐마드 이븐 툴룬의 아들 후마라와이흐 시대에는 문화적으로 더욱 화려한 면모를 보였다. 그는 호화로운 궁전과 정원을 짓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지만, 동시에 학문과 시를 후원하며 문예 활동을 장려하기도 했다.[1][14] 특히 그의 딸 카트르 알-나다와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무타디드 사이의 결혼은 막대한 지참금과 화려한 예식으로 유명했고,[1][14] 이 이야기는 후대에까지 전해져 민속 문학 등의 소재가 되었다.[1][14] 이 결혼은 이슬람 역사에서 드문 왕족 간의 결합[8][22]이자, 일반적인 이슬람 결혼 관습(마흐르)과 다른 지참금 문화[9][23]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주목받았다.
3. 1. 건축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기존 수도인 푸스타트 북쪽에 자신만의 수도인 알-카타이를 건설하고 그곳에 정부 청사를 두었다.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자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유적이 바로 이븐 툴룬 모스크이다.[7][21] 이 모스크는 아바스 왕조가 수도를 바그다드에서 사마라로 옮겼을 때 유행했던 사마라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모스크와 같은 종교 건물뿐만 아니라 일반 주택과 같은 세속적인 건물에도 널리 적용되었다. 실제로 툴룬 왕조 시대에 지어진 주택 중 일부에는 사마라 양식의 스투코 패널 장식이 남아있다.[7][21]
후마라와이흐의 통치 시기에는 아버지 아흐마드 이븐 툴룬 시대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이 건축에 투입되었다. 그는 자신과 총애하는 신하들을 위해 화려한 궁전과 정원을 지었다. 특히 푸른 눈을 가진 사자 조각상으로 장식된 그의 궁전은 당시 이집트인들에게 그의 사치와 낭비를 상징하는 건물로 여겨졌다. 또한 그의 마구간은 매우 거대하여, 민간 설화에 따르면 후마라와이흐는 한 번 탔던 말은 다시 타지 않았다고 전해질 정도였다.[1][14] 비록 이러한 대규모 건축 사업이 왕조의 재정을 어렵게 만들었지만, 그의 시대에 이루어진 건축 활동은 툴룬 왕조의 문화적 번영을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했다.
3. 2. 예술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이전 수도인 푸스타트 북쪽에 자신만의 수도 알-카타이를 건설하고 정부 청사를 두었다.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건축물은 이븐 툴룬 모스크이다. 이 모스크는 당시 아바스 왕조의 수도였던 사마라의 건축 양식을 따라 지어졌다. 사마라 양식은 종교 건축물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건물에도 널리 적용되었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툴룬 왕조 시대의 주택에서도 사마라 양식의 스투코(stucco) 장식 패널을 찾아볼 수 있다.[7][21]
후마라와이흐의 통치 시기는 아버지 아흐마드 이븐 툴룬 시대보다 훨씬 사치스러웠다. 그는 자신과 총애하는 신하들을 위해 화려한 궁전과 정원을 지었다. 특히 푸른 눈을 가진 사자 조각상으로 장식된 그의 궁전은 당시 이집트인들에게 그의 낭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졌다. 그의 마구간은 매우 거대하여, 민간 설화에 따르면 후마라와이흐는 한 번 탔던 말은 다시 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그는 왕조의 재산을 낭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과 시를 후원하며 풍요로운 문화 생활을 장려하기도 했다. 유명한 문법학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흐 이븐 무함마드 무슬림(Muḥammad ibn ʿAbd Allāh ibn Muḥammad Muslim, 944년 사망)은 그의 후원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들의 스승이 되었다. 또한 시인 카심 이븐 야흐야 알-말야미(Ḳāsim b . Yaḥyā al-Maryamī, 929년 사망)는 후마라와이흐의 전쟁 승리를 기리는 찬가를 짓기도 했다.[1][14]
후마라와이흐는 그의 최측근 조언자인 알-후사인 이븐 자사스 알-자우하리의 중재를 통해, 그의 딸 카트르 알-나다를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무타디드와 결혼시키는 중세 이슬람 역사상 중요한 정치적 결혼 중 하나를 성사시켰다. 892년에 이루어진 이 결혼식은 엄청난 규모의 지참금이 오고 간 것으로 유명한데, 그 액수는 40만에서 100만 디나르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이 호화로운 결혼식이 툴룬 왕조의 재정을 고갈시키려는 아바스 왕조의 계산된 전략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카트르 알-나다의 화려한 결혼식 이야기는 이후 오스만 제국 시대까지 이집트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연대기나 민속 문학에 기록될 정도였다.[1][14] 이 결혼은 왕족 간의 결혼 자체가 이슬람 역사에서 드문 일이었고, 신부 측에서 지참금을 주는 관습 역시 일반적인 이슬람 결혼(보통 신랑이 신부에게 마흐르를 지급함)과 달랐기 때문에 더욱 주목받았다.[8][22][9][23]
3. 3. 종교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수니파 학자들을 지원하여 이집트 내 이슬람 과학, 특히 하디스 전달의 발전을 이끌었다. 이는 이집트 배후 지역의 이슬람화에도 기여했다.[10] 또한 이븐 툴룬은 샤피이 학파의 이슬람 율법을 공식적으로 지원했는데, 이는 미흐나 시기를 거치며 쇠퇴했던 이슬람 율법을 다시 부흥시키고 대중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1]3. 4. 문학
후마라와이흐의 치세는 그의 아버지 아흐마드 이븐 툴룬보다 지출이 많았지만, 학문과 시를 후원하며 풍요로운 문화 생활을 장려하기도 했다.[1] 그는 유명한 문법학자 무함마드 이븐 압드 알라 이븐 무함마드 무슬림(944년 사망)을 후원했으며, 이 학자는 후마라와이흐 아들들의 스승이기도 했다. 또한 시인 Ḳāsim b. Yaḥyā al-Maryamī(929년 사망)는 후마라와이흐의 전장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찬가를 썼다.[1]한편, 후마라와이흐의 딸 Ḳaṭr al-Nadā와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무타디드 간의 892년 결혼은 중세 이슬람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 결혼식에는 40만에서 100만 디나르 사이로 추정되는 엄청난 지참금이 포함되었는데, 일부에서는 이 결혼의 화려함이 툴룬 왕조를 재정적으로 약화시키려는 아바스 왕조의 계산된 시도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1] Ḳaṭr al-Nadā의 화려한 결혼 이야기는 후대 오스만 제국 시대까지 이집트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연대기 및 민속 문학에 기록되었다.[1]
4. 군사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이집트에서 독립적인 군사력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그는 원래 바그다드와 사마라에서 활동하던 튀르크 경호대 출신으로, 868년 압바스 왕조 칼리프 알 무타즈의 대리인 바야크바크에 의해 이집트 주지사로 파견되었다.[4][5] 이집트에 부임한 이븐 툴룬은 즉시 독자적인 군대를 창설하고 재정을 장악하여 이집트 내에서 확고한 군사적, 재정적 기반을 마련했다. 870년 팔레스타인 총독 이사 이븐 알-샤이크의 반란은 자치적인 군사력의 필요성을 더욱 명확하게 만들었다.[1][5] 그는 수단인, 그리스 노예 병사, 페르시아인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군대를 구성했다.[5]
툴룬 왕조는 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877년 압바스 왕조의 공격을 막아냈고, 878년에는 시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비잔틴 제국과의 국경 지대까지 세력을 넓혔다. 이는 압바스 왕조의 공격으로부터 이집트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6]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잘 훈련된 군대와 안정적인 경제를 기반으로 아들 쿠마라와이흐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5]
쿠마라와이흐 역시 아버지의 다민족 군대 정책을 이어받아 군사력을 강화했으며, 이를 통해 시리아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침공을 막아내고 북부 이라크와 타르수스까지 권위를 확장했다.[12] 그는 압바스 왕조와 두 차례 조약을 맺어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에 대한 툴룬 왕조의 통치권을 인정받았다(886년, 892년). 그러나 쿠마라와이흐 시대에 군대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재정 고갈, 내부 분열 등이 심화되면서 왕조 쇠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툴룬 왕조 군대는 창설 초기부터 충성심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는 왕조 말기까지 지속적인 문제로 남았다.[1]
4. 1. 군사 조직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툴룬 왕조의 군대와 해군을 창설했다.[1] 자치적인 군사력의 필요성은 870년 팔레스타인 총독이었던 이사 이븐 알-샤이크(ʿĪsā ibn al-S̲h̲ayk̲h|이사 이븐 알샤이크ar)의 반란 이후 명백해졌다. 이에 대응하여 이븐 툴룬은 수단인과 그리스 노예 병사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병사들은 페르시아인과 수단인이었을 수도 있다.[5]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대규모 노예(굴람) 군단을 조직했으며, 총 병력은 자유 신분 아랍인 7,000명, 굴람 병사 24,000명, 흑인 노예 병사 45,0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17] 그의 아들 쿠마라와이흐는 아버지의 다민족 군대 정책을 이어갔다. 그의 군사력은 흑인 수단 병사, 그리스 용병, 그리고 투르키스탄에서 온 새로운 투르크 병력으로 강화되었다.[24][12]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툴룬 왕조 가문을 호위하기 위해 정예 근위대를 창설했다. 이들은 툴룬 왕조 군대의 핵심을 이루었으며, 그 주변에 다른 대규모 연대가 구축되었다. 이 병력은 아흐마드 이븐 툴룬의 통치 기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고르(G̲h̲ūr|구르fa) 지역 출신이었고, 쿠마라와이흐의 통치 기간에는 현지 아랍인 출신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871년에 열린 의식에서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자신의 군대가 그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툴룬 왕조 군대에서는 이탈자가 발생했는데, 특히 883년에는 고위 지휘관 루루(Luʾlu|루루ar)가 압바스 왕조로 망명하는 사건이 있었다. 군대는 존속 기간 내내 충성을 확보하는 데 지속적인 문제에 직면했다.[1][14]
쿠마라와이흐 또한 '알-무크타라'(al-muk̲h̲tāra|알무크타라ar)라고 불리는 정예 부대를 창설했다. 이 부대는 나일강 삼각주 동부 출신의 베두인으로 구성되었다. 쿠마라와이흐는 이 부족민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그들을 효율적이고 충성스러운 호위병으로 전환함으로써,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 지역에 평화를 가져왔다. 그는 또한 이 전략적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재확립했다. 이 연대에는 1,000명의 수단 원주민도 포함되었다.[1][14]
툴룬 왕조 군대가 중요한 역할을 한 주요 군사 활동은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용 | 결과/비고 |
---|---|---|
877 | 무사 이븐 부가가 이끄는 압바스 왕조 군대의 아흐마드 이븐 툴룬 폐위 시도 | 툴룬 왕조 군대의 힘 과시 후 압바스 군대 철수[13] |
878 | 시리아 점령 | 비잔틴 제국에 맞선 국경 지역(투구르) 방어를 위한 지하드 명분. 아흐마드 이븐 툴룬의 이집트 귀환으로 조기 종료. |
885 | 밀 전투 (알-타와힌) |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침공한 압바스 왕조 군대(아흐마드 이븐 알-무와파크, 미래의 칼리프 알무타디드)와 격돌. 툴룬 왕조 장군 사드 알-아이스르가 승리[1] |
885-886 | 이샤크 이븐 쿤다지 격파 | 쿠마라와이흐 지휘. 자지라, 킬리키아, 하란 등 동쪽 지역이 툴룬 왕조에 항복. 평화 조약 체결[1] |
896-905 | 툴룬 왕조 멸망 | 압바스 왕조가 수도 알-카타이를 점령하는 것을 막지 못함[1] |
쿠마라와이흐의 통치 하에서 시리아-이집트 국가의 재정과 군대는 재정 고갈, 정치적 내분, 압바스 왕조의 진출 등으로 인해 불안정해졌다. 쿠마라와이흐는 또한 튀르크족과 사하라 이남 병사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4. 2. 주요 전투
툴룬 왕조 군대가 중요한 역할을 한 주요 군사적 교전은 다음과 같다.- 877년: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이끄는 툴룬 왕조 군대는 압바스 왕조의 무사 이븐 부가가 이끄는 군대의 침공 시도를 무력화시켰다. 툴룬 군대의 힘을 확인한 압바스 군대는 아흐마드 이븐 툴룬을 축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13]
- 878년: 툴룬 왕조는 비잔틴 제국에 맞서 국경 지역(투구르)을 방어한다는 명분(지하드)으로 시리아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븐 툴룬이 이집트로 급히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여 군사 작전은 조기에 종료되었다.
- 885년: 쿠마라와이흐가 지휘하는 툴룬 왕조 군대는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압바스 왕조 군대와 밀 전투(알-타와힌)를 벌였다. 아흐마드 이븐 알-무와파크(훗날 칼리프 알-무타디드)가 이끄는 압바스 군대는 시리아를 침공했고, 다마스쿠스 총독은 압바스 측에 항복했다. 전투 중 아흐마드와 쿠마라와이흐가 모두 전장을 이탈했지만, 툴룬 왕조의 장군 사드 알-아이스르가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1]
- 885년 ~ 886년: 쿠마라와이흐는 더 많은 병력을 가진 이샤크 이븐 쿤다지를 격파했다. 이 승리를 기점으로 자지라, 킬리키아, 하란 등 동쪽 지역이 툴룬 왕조에 항복했다. 이후 툴룬 왕조와 압바스 왕조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군사적 충돌은 종식되었다.[1]
- 896년 ~ 905년: 툴룬 왕조가 쇠퇴하면서, 압바스 왕조 군대가 수도 알-카타이를 점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는 툴룬 왕조의 실질적인 멸망으로 이어졌다.[1]
5. 경제
아흐마드 이븐 툴룬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 경제는 압바스 왕조로부터 재정적, 군사적 자립을 이루면서 번영을 누렸다. 완전한 자치 상태를 확보하면서 세금 수입이 더 이상 칼리프가 있는 바그다드로 유출되지 않게 되었고, 이는 관개 시설 개발, 해군 건설 등 이집트 내부의 경제 발전을 위한 투자로 이어졌다.[6] 이러한 투자는 지역 경제와 무역을 크게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6]
경제 번영의 또 다른 요인은 꾸준히 높았던 나일강의 범람 수위 덕분에 농업 생산량이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는 점이다.[1]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행정 개혁을 단행하여 상인 공동체와 긴밀히 협력하고 과세 제도를 정비했으며,[1] 농업 기반 시설을 수리하고 확충했다.[14] 이러한 개혁과 안정적인 농업 생산은 경제 전반의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특히 섬유 산업(린넨 포함)이 크게 번창하여 생산, 투자, 지중해 무역의 핵심 분야가 되었다.[1][14]
툴룬 왕조의 행정은 고도로 중앙집권적이었으며, 이집트의 상업, 종교, 사회 엘리트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운영되었다.[1]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기존의 이라크 출신 관리들을 이집트인으로 교체하고, 강력한 상인 공동체의 재정적, 외교적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1] 또한, 조세 수입권(tax-farming)의 활용을 확대하여 새로운 토지 소유 엘리트층의 성장을 촉진하기도 했다.[1]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븐 툴룬이 행정 관리들의 사적인 수탈을 금지하고, 국가 수입의 대부분을 외부로 유출하는 대신 이집트 내 건설 사업과 상공업 활성화에 재투자했다는 점이다.[1]
초기에는 압바스 왕조에 대한 세금 납부를 거부하며 재정적 자립을 유지했으나,[1] 이후 알 무와파크와의 갈등[1] 및 아들 후마라와이흐 시대에 이르러서는 압바스 왕조와 조약을 맺고 매년 30만 디나르의 조공을 바치는 관계로 전환되었다.[1][14] 그러나 후마라와이흐의 통치 기간 동안 과도한 지출로 인한 재정 고갈과 정치적 불안정은 결국 툴룬 왕조 쇠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5]
5. 1. 농업
아흐마드 이븐 툴룬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 경제는 번영을 누렸다. 꾸준한 나일강의 높은 범람 덕분에 농업 생산량이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1] 아바스 왕조로부터 완전한 자치를 이루면서 세금 수입이 더 이상 칼리프가 있는 바그다드로 유출되지 않게 되자, 이를 재원으로 관개 시설을 개발하고 정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1] 이러한 농업 기반 시설의 확충은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농업 생산 증대와 더불어 다른 산업, 특히 섬유 산업도 함께 번창했으며, 린넨 생산은 특히 중요한 부문이었다.[1]5. 2. 산업
아흐마드 이븐 툴룬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 경제는 번영을 누렸다. 꾸준히 수위가 높았던 나일강의 범람 덕분에 농업 생산량이 호조를 보였으며, 특히 섬유를 비롯한 다른 산업들도 번창했다.[1] 이븐 툴룬은 그의 행정에서 자율성을 주장하며 바그다드의 중앙 아바스 왕조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또한 행정을 개혁하여 상인 공동체와 협력하고 과세 제도를 변경했다. 툴룬 왕조 시대에는 농업 기반 시설의 수리도 이루어졌다.[14] 생산, 투자, 그리고 지중해 전역의 상업 활동에서 핵심 분야는 섬유 산업이었으며, 특히 린넨 생산이 중요했다 (Frantz, 281–5).[1]툴룬 왕조 시대의 재정 관료는 알마드하라'이 가문의 구성원들이 이끌었다.[14]
5. 3. 재정 정책
아흐마드 이븐 툴룬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 경제는 번영을 누렸다. 꾸준한 나일강의 높은 범람 덕분에 농업 생산량이 높았으며, 특히 섬유(린넨 포함)를 비롯한 다른 산업들도 번창했다.[1][14] 이븐 툴룬은 압바스 왕조의 중앙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거부하며 행정에서 자율성을 주장했다. 그는 또한 행정을 개혁하여 상인 공동체와 제휴하고 과세 제도를 변경했으며, 농업 기반 시설의 수리도 이루어졌다.[1] 툴룬 왕조 시대의 재정 관료는 알마드하라'이 가문이 주도했다.[1]870년부터 872년까지 이븐 툴룬은 이집트의 재정 행정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871년에는 하라지 세금 징수권을 장악하고 시리아의 투구르 지역에서도 동일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또한 재무부 수장이자 압바스 왕조 관료였던 이븐 알-무다비르(Ibn al-Mudabbir)를 상대로 승리하며 재정적 입지를 굳혔다.[1][14]

그러나 압바스 칼리프국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알 무와파크는 이븐 툴룬의 재정적 자립에 불만을 품었다. 그는 잔지 반란 진압을 위한 자금 확보와 툴룬 왕조의 자율성 제한을 목적으로 이집트의 수입을 통제하려 했다. 이러한 자금 필요성은 부유한 이집트에 대한 바그다드의 관심을 증폭시켰다.[1][14] 결국 877년, 알-무와파크는 이븐 툴룬이 요구된 자금을 보내지 않자 그를 폐위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1][25] 그럼에도 이븐 툴룬은 최소 두 차례에 걸쳐 상당한 액수의 수입과 선물을 아바스 중앙 정부에 보냈다.[1][14]
아흐마드의 아들 후마라와이흐 시대에는 아바스 왕조와 공식적인 조약을 체결하여 적대 행위를 종식하고 조공 지불을 재개했다. 886년 알 무와파크와 체결한 첫 조약에서 재정 관련 조항이 마련되었고, 892년 알-무와파크의 아들 알 무타디드와 체결한 두 번째 조약은 이전 조약의 정치적 조건을 재확인했다. 이 조약들에 따라 툴룬 왕조는 매년 30만 디나르(이 숫자는 부정확할 수 있음)를 아바스 왕조에 지불하기로 했다.[1][14]
툴룬 왕조의 행정은 고도로 중앙집권적이었으며 권력 행사에 있어 "무자비함(pitiless)"을 보이기도 했으나, 이집트의 상업, 종교, 사회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강력한 상인 공동체의 재정적, 외교적 지원에 크게 의존했는데, 예를 들어 이집트 상인 공동체의 주요 인물인 마마르 알자와하리(Maʿmar al-Ḏj̲awharī)는 이븐 툴룬의 재정 담당자로 활동했다.[1]
툴룬 왕조는 정치적 안정을 유지함으로써 경제 번영을 이루었는데, 이는 당시 이집트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상부 이집트에서 콥트인들과 일부 아랍 유목민들이 일으킨 고립된 반란들은 툴룬 왕조의 효율적인 재정 관행에 대한 반발이었을 뿐, 왕조의 권력을 위협하지는 못했다. 경제는 툴룬 왕조 이전과 통치 기간 동안 도입된 개혁들을 통해 강화되었다. 세금 평가 및 징수 시스템이 변경되었고, 조세 수입권(tax-farming)의 사용이 확대되어 새로운 토지 소유 엘리트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1] 아흐마드 이븐 툴룬의 농업 및 행정 개혁은 높은 세금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이 열정적으로 토지를 경작하도록 동기를 부여했으며, 행정 관리들의 사적인 수탈을 금지했다.[1]
이븐 툴룬 치하 행정부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수입의 대부분을 수도 바그다드로 보내던 관행을 중단한 것이다. 대신 그는 이 자금을 이집트 내 건설 사업에 투자하여 지역 사회에 혜택을 주고 상업과 산업을 활성화하는 데 사용했다.[1]
5. 4. 무역
아흐마드 이븐 툴룬의 통치 아래 이집트 경제는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이는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압바스 왕조의 중앙 정부가 있는 바그다드에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율적인 통치를 확립했기 때문에 가능했다.[1][14] 이러한 자치 덕분에 확보된 재정 수입은 관개 시설 개발과 해군 건설에 투자될 수 있었고, 이는 지역 경제와 무역을 크게 활성화하는 기반이 되었다.[6]또한, 꾸준히 높았던 나일강의 범람 수위 덕분에 농업 생산량도 높은 수준을 유지했으며,[1][14]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행정 개혁을 통해 상인 공동체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과세 제도를 변경했으며, 농업 기반 시설 정비에도 힘썼다.[1][14]
이 시기 생산, 투자, 그리고 지중해 전역의 상업 활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분야는 섬유 산업이었으며, 특히 린넨 생산이 중요했다(Frantz, 281–5).[1][14] 툴룬 왕조 시대의 재정 관리는 주로 알-마드하라'이 가문의 인물들이 담당했다.[14]
6. 툴룬 왕조의 아미르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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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개인명 | 치세 |
---|---|---|
칼리프 알 무타미드 치세 하의 아바스 왕조로부터 사실상 자립. | ||
아미르 أمیرar | 아흐마드 이븐 툴룬 أحمد بن طولونar | 868년-884년 |
아미르 أمیرar 'Abu l-Jaysh'' ابو جیشar | 쿠마라와이흐 이븐 아흐마드 이븐 툴룬 خمارویہ بن أحمد بن طولون ar | 884년-896년 |
아미르 أمیرar 'Abu l-Ashir ابو العشیر ar Abu -Asakir ابو العساكرar | 자이쉬 이븐 쿠마라와이흐 جیش ابن خمارویہ بن أحمد بن طولون ar | 896년 |
아미르 أمیرar Abu Musa ابو موسیar | 하룬 이븐 후마라와이흐 ہارون ابن خمارویہ بن أحمد بن طولون ar | 896년-904년 |
아미르 أمیرar 'Abu l-Manaqib'' ابو المناقبar | 샤이반 이븐 아흐마드 이븐 툴룬 شائبان بن أحمد بن طولونar | 904년-905년 |
알 무크타피 치세 하의 아바스 왕조가 파견한 장군 무함마드 이븐 술라이만에 의한 재정복. |
7. 주변 국가
당시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내부 정치는 불안정했다. 870년, 알 무아파크는 메카에서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남부 이라크에 대한 아바스 왕조의 권위를 다시 세우려 했고, 곧 칼리프의 섭정이 되었다. 이러한 정세의 불확실성을 틈타,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세력을 확장할 기회를 얻었다.
툴룬은 지역 권력을 확보하며 아바스 왕조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툴룬 왕조는 같은 9세기에 등장한 아글라브 토후국이나 타히르 토후국과 같은 다른 이슬람 왕조들과 비교될 수 있다.[32]
툴룬 왕조 시대의 주요 주변 세력으로는 다음과 같은 국가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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